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리히 폰 만슈타인 (문단 편집) === [[프랑스 침공]]과 낫질 작전 === 1939년 후반, 독일군의 작전 입안자들이 프랑스 침략과 점령 계획을 모의하기 위해 모였다. 그들이 찾아낸 최선의 답은 '[[슐리펜 계획]]'의 현대화된 형태였다. 1914년과 마찬가지로 독일군은 북해에서 [[룩셈부르크]] 남단까지 뻗은 광활한 전선에서 저지대 국가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침공할 준비를 했다. 벨기에를 점령함으로써, 독일군은 [[마지노 선]]과 프랑스군과 [[영국]] 원정군 사이에 위치한 중부 혹은 동부 프랑스의 어디쯤에서 [[프랑스군]]과 [[영국군]]을 포위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황색 작전]]'이라 명명된 이 계획은 이미 알려진 슐리펜 계획의 단순한 복사판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것은 없었고, 잠재적으로 오히려 재앙에 가까웠다. 다큐멘터리 ‘10대 사건으로 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이러한 재앙과 같은 작전은 의도적인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보수파 장교들이 히틀러의 프랑스 침공 의지를 단념시키기 위해 의도적인 태업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한편 육군 상급대장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룬트슈테트]] 의 [[참모장]]으로 자리를 옮긴 만슈타인은 그의 명성을 드높이게 되는 [[낫질 작전]]을 입안하게 된다. 당시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OKH)는 프랑스를 침공하기 위해 '황색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황색 작전은 1차 대전 때의 [[슐리펜 계획]]과 거의 다를 것이 없는 작전으로 실행했다가는 예상하고 있던 프랑스의 방어 계획(딜 계획)에 죄다 막혀 버릴 수 있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슐리펜 계획의 복사판에 가까운 이 계획이 그대로 실행되었다면 그것은 독일군에게 완전한 재난으로, 1차 대전 때 경험했던 [[참호전]]을 연상케 하는 교착 상태를 그대로 재현되면서 2차 대전이 조기에 끝났을지도 모른다. 이런 문제를 간파한 만슈타인은 [[하인츠 구데리안]]과 함께 머리를 굴리다가 당시 A[[집단군]]을 맡고 있던 룬트슈테트에게 '낫질 작전'(지헬슈니트 계획), 일명 '만슈타인 계획'을 설명한다. 낫질 작전은 프랑스 영토 내의 프랑스군과 영국 원정군을 분리시키기 위해서 주공을 북부의 B집단군이 아닌 룬트슈테트의 A집단군으로 변경하고, 모든 기갑 전력을 아르덴 숲 쪽으로 집중시켜 스당 지방을 급속 돌파함으로써 벨기에에 있는 [[연합군]]의 반격을 저지하고 적의 주력을 역으로 포위 섬멸하자는 획기적인 작전 내용으로 고도로 훈련된 근접 지원 항공기([[슈투카]])와 차량화 보병, 기갑 부대가 강력히 필요한 계획안이었다. 룬트슈테트는 비록 만슈타인의 계획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OKH에 낫질 작전을 실행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기발한 작전을 반기기는 커녕 분노한 다른 육군 장군들은 만슈타인이 자신들의 권위를 무시한 채 독자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다며 그의 무례함을 질타했다. 육군 최고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치]]와 [[육군참모총장]] [[프란츠 할더]]는 당시 무모해 보였던 낫질 작전에 크게 반대하며 황색 작전을 원안대로 실행할 것을 고수했다. 사실 그때까지는 기갑 부대의 기동을 통한 공격의 중요성이 아직 제대로 인식되지 못한 시기였고 아르덴 숲은 전차가 통과하기에 좋은 지형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룬트슈테트는 만슈타인이 짤리고 [[https://en.wikipedia.org/wiki/Georg_von_Sodenstern|게오르크 폰 조덴슈테른]] 보병대장이 참모장으로 들어오자마자 작전 반대를 시작했다.[* 낫질 작전 중에 정지 명령으로 독일군이 정지, '[[됭케르크 철수작전|됭케르크의 기적]]'이 일어났던 것에는 이 사람 책임도 좀 있다.] 만슈타인은 기갑 부대가 충분히 아르덴 숲을 통과할 수 있다는 구데리안의 주장과 함께 줄기차게 낫질 작전의 실행을 주장하다가 그 '보답'으로 뿔난 할더에 의해 폴란드 전선에 배치된 제38[[군단장]]에 임명된다. 사실상의 [[좌천]]이었다. 덕분에 1940년 1월 10일까지는 군부에서 완전히 잊힌 인물로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만슈타인은 생각하지도 못한 기회를 얻게 되는데 바로 '''[[아돌프 히틀러]]'''와의 만남이었다. 만슈타인의 보좌관 중에 히틀러 [[비서실장]] 루돌프 슈문트 육군 [[대령]]과 친한 육군 [[소령]]이 한 명 있었는데, 그 연줄을 이용해 슈문트 대령에게 만슈타인의 계획을 설명하게 된다. 이를 들은 슈문트는 신임 장군들과의 조찬식이 끝난 후 만슈타인을 히틀러의 집무실로 불렀는데, 만슈타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낫질 작전을 설명해 히틀러를 감복시킨다. 1차 대전 동안 참호에서 고생했던 히틀러로서는 슐리펜 계획을 조금 손본 것에 불과한 황색 작전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른 방법을 찾지를 못해 고심하던 차에 만슈타인을 만난 것이다. 하지만 아직 작전 성공에 의구심이 있던 히틀러는 결심을 내리지 못했는데, 마침 운명의 장난인지 1940년 1월 10일 독일군의 기존 황색 작전이 설명된 비밀 문서를 휴대한 [[루프트바페]] 소속 참모장교였던 헬무트 라인베르거 소령이 탑승하고 있던 [[Fi 156 슈토르히|슈토르히 경비행기]]가 벨기에에 불시착하고 생존한 조종사가 포로로 잡혀 문서가 노획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히틀러는 결정적으로 낫질 작전을 지지하게 된다. 그때 할더도 마지못해 다른 방도가 없었으므로 낫질 작전의 필요성을 깨닫고 자신의 의견을 접고 만슈타인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뒤 OKH는 낫질 작전을 전격적으로 채택하게 된다.[* 할더는 전후 낫질 작전은 자신의 작품이라고 은근슬쩍 주장하다가 빈축을 샀다.] 이런 곡절 끝에 [[1940년]] 여름 낫질 작전을 실행한 결과, '''프랑스는 6주 만에 독일에게 백기 들고 히틀러는 [[에펠탑]]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칼 프리저는 저서 '[[전격전의 전설]]'에서 [[전격전]]은 낫질 작전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정확히 말해서 '''전격전이라는 이름의 환상'''이라고 할 수 있다. 프리저는 '전격전의 전설'에서 한 챕터를 할당해 애초에 독일이 프랑스 전역을 개전하기 전까지 '고속 기동을 이용한 적의 심리적 격파'라는 전격전의 개념이, 심지어 전격전이라는 용어조차도 '헛소리'라고 평가되었음을 설명한다. 실제로 독일 수뇌부는 [[폴란드 침공]] 직후 영, 프의 [[선전포고]]에 극도로 혼란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이는 독일군이 프랑스를 노리고 전격전을 갈고 닦았다면 있을 수가 없는 모습이다[* 히틀러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외무장관에게 소리를 버럭 지르고, 괴링은 암울한 표정으로 '우리가 망하면 신은 우리에게 한번 더 기회를 줄까?'라는 소리를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 인용 부분은 [[프랑스 침공]] 항목에 서술되어 있다.] 더군다나 독일 군사학계에서 '전격전'이라는 용어가 최초로 등장하는 35년도의 문서 자체가 '전격전은 헛소리'라고 비판하는 내용이다. 폰 라베나우 [[중령]]은 '''전격전은 바로 과거의 기동전으로의 회귀'''라고 밝혔다가 히틀러의 측근들에게서 발표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기도 했다. 낫질 작전 시행 중 만슈타인은 제38군단을 이끌고 참전, [[센 강]]을 도하하여 제일 먼저 [[파리(프랑스)|파리]]에 입성해 실전 지휘에도 능한 모습을 보여줬다.[* 프랑스 전역에서의 만슈타인의 역할을 더 알고 싶으면 <전격전의 전설>을 참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